작곡가 소개

클래식 계의 스티브 잡스 - 리하르트 바그너의 일생

교클 2022. 10. 17. 16:42
반응형

Wilhelm Richard Wagner ,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

독일 출신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it업계에서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입니다.

스티브 잡스처럼 바그너는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었습니다.

바그너는 여러 후원자들의 후원을 받아 생활했음에도 보답은커녕 뒤통수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습니다.

그의 특기는 지인, 후원자들의 아내들과 사귀는 것이었고 그에게 돈을 빌려주면 다시 받기 힘든 걸로 악명 높았습니다.

그리고 당대에는 크게 논쟁대상이 아니었지만 현대에는 그의 반유대주의 사상 때문에 반유대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의 음악을 소비하는 게 옳은 것인가 vs 정치와 예술은 별개이다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죠.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바그너 음악을 거의 연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인성 면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었음에도 클래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클래식 음악에서 새롭고 참신한 작곡 기법을 대거 도입하여 클래식 음악의 혁신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여 살아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오랫동안 그를 중심으로 그를 계승하는 사람과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로 나누어 싸웠습니다.

잡스와 애플이 수많은 마니아들을 만들어낸 것처럼 그의 오페라에 매료된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숭배하였습니다. 이들은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유명한 특정 작곡가의 마니아로 이들을 가리켜 흔히 바그네리안이라고 부르죠. 이들은 바그너가 자신의 오페라의 공연만을 위하여 건설한 바이로이트 극장에 가서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는데 이는 흔히 성지순례에 비유되곤 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일생으로 알 수 있는 수많은 인격적인 결함에도 왜 사람들이 바그너에게 열광하는지, 그가 클래식계에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에 대하여 적어보겠습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중  3막 전주곡. 3분 23초부터 나오는 음악이 바그너 본인보다 더 유명한 곡 '결혼 행진곡' 입니다 .

 

 

일생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522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뽐내던 다른 유명한 작곡가들과 달리 바그너의 집안은 딱히 음악과 관련이 없었고 바그너 역시 어린 시절에는 신동 같은 것과는 별로 관련 없는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다만 그는 생후 반 년만에 사망한 친부가 연극을 좋아했으며 계부는 연극배우였습니다. 때문에 극장과는 밀접한 삶을 살았고 이는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가 되는 계기가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인 바그너는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피아노 소나타를 비롯한 몇 몇 곡들을 작곡하였습니다.

이후 18세 때에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바그너는 1836년에 첫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대상은 4살 연상의 민나 플래너라는 배우였습니다.

무명시절 이 여자의 외모에 반해 끈질긴 구애로 결혼에 성공하였지만 정작 둘의 가치관이나 성격차이가 너무 심하여 결혼생활은 전혀 원만하지 않았고 바그너는 무명시절부터 온갖 고난을 함께했던 조강지처를 유명 작곡가가 되고난 이후 가차없이 버렸습니다.

민나는 1866년에 사망하였는데 바그너는 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1870년 바그너는 재혼을 하죠.

 

오랫동안 무명 작곡가로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바그너는 1842년 오페라 리엔치의 대흥행으로 드디어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맛봅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발표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역시 연이은 흥행에 성공합니다.

사실 첫 흥행작 리엔치의 경우에는 본인도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현재에는 인기 있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본격적인 바그너 스타일 오페라의 첫 시작을 여는 작품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바그너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그 뒤로도 탄호이저, 로엔그린두 작품 역시 히트를 치며 바그너는 본격적으로 유명 오페라 작곡가가 되지만 1848년 혁명에 참여했다 실패하고 가까스로 독일에서 탈출하여 11년동안 망명생활을 시작합니다.

 

1849년 바그너는 프란츠 리스트의 도움으로 스위스 취리히에 정착하여 음악활동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바그너는 음악, 미술, 문학 등이 모두 높은 비중을 가지는 종합예술로서 악극이라는 개념을 처음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그는 바그너 일생의 역작인 니벨룽겐의 반지4부작의 대본과 1,2부인 라인의 황금, 발퀴레의 작곡을 완료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그는 새로운 사랑(=불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대상은 그의 취리히에서 인연을 맺은 후원자 오토 베젠동크의 부인 마틸데 베젠동크.

그는 한창 작곡하던 반지 4부작도 잠시 내려놓은 채 자신의 애끓는 불륜사랑의 감정에 이끌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곡을 시작하였고 오랜 진통 끝에 1859년 작곡을 완료합니다.

 

바그너는 이제 상당히 유명해졌고 자신의 곡을 무대에 올리기 위하여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곡을 무대에 올리는 데는 상당한 돈이 필요했던 데다 재정 관리에는 관심이 없었던 바그너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이 상황은 1864년 바그너 빠였던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벗어나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이 즈음에 바그너는 또 한 번 새로운 사랑(=불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번 불륜의 대상은 무려 친구(프란츠 리스트)의 딸이자 제자(한스 폰 뷜로)의 아내인 코지마 뷜로.

이 사실을 안 뷜로는 당연히 엄청난 쇼크를 받고 바그너와 결별 후 라이벌이었던 브람스 편으로 돌아섰으며 리스트는 노발대발하여 바그너는 물론 딸 코지마와도 절연하였습니다.(그래도 바그너와는 나중에 다시 화해를 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딸은 평생 아버지와의 만남을 피하죠ㅠㅠ)

 

그나마 다행이었던 사실은 코지마는 바그너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여성상에 부합하는 인물이었고(음악적으로 통달해 있는 똑똑한 인물이면서 본인에게는 조건 없이 헌신해 주는 사람이라는 더럽게 까다로운 조건) 둘의 궁합은 상당히 잘 맞았습니다.

결국 코지마는 뷜로와 정식으로 이혼한 후 1870년 바그너와 결혼하여 3명의 자녀를 가집니다.

코지마는 바그너 사후에도 바이로이트 축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바이로이트 극장을 바그네리안들의 성지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루트비히 2세의 도움으로 금전적 문제가 해결된 바그너는 1876년 마침내 필생의 역작 니벨룽겐의 반지3부인 지그프리트4신들의 황혼을 완성하여 같은 년도에 건설한 니벨룽겐의 반지만을 위한 전용 극장인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전곡 초연을 합니다. 4부작은 한 편당 공연시간이 3~4시간에 달하고 전곡을 다 들으려면 무려 16시간이 걸리는 희대의 대작입니다.

이후 바이로이트 극장은 바그네리안들의 성지가 되며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니벨룽겐의 반지 공연을 보는 것은 바그네리안의 성지순례 코스가 되죠.

 

말년의 바그너는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자신의 종교관이 담긴 작품을 작곡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결과로 만들어진 그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은 기독교, 불교, 게르만 신화 등이 결합한 그의 독특한 종교관이 담긴 최후의 걸작 오페라입니다.

1882년에 이루어진 파르지팔의 초연은 성공하였지만 이 작품을 작곡하면서 바그너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습니다.

결국 파르지팔 초연 후 7개월 후인 1883, 수십 년간 음악계의 핵폭탄으로 음악계의 혁신을 이끌었던 바그너는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반응형

 

바그너의 영향력

 

그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곡의 숫자는 많지 않아도 후배 작곡가들에게 끼친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들인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과 작곡법에서 주목할 만한 것들을 꼽아보겠습니다.

 

 

1.관현악법

모차르트, 베토벤이 활동하던 고전파 시대까지만 해도 금관악기에 밸브가 달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배음 영역에 포함되는 제한된 음들만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현악기가 주요 멜로디를 연주하고 금관악기들이 반주를 하는 식으로 오케스트레이션을 할 수밖에 없었죠. 심지어 베토벤의 작품들을 연주할 경우에는 몇 몇 곡들에서 현대 악기에 맞게 악보를 수정하여 연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낭만파 시대에 들어오고 기술의 발전으로 금관악기들이 옥타브 안의 모든 음들을 연주할 수 있도록 개량이 되었고 바그너는 이런 악기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금관악기들이 멜로디를 연주하고 현악기들이 반주를 하는 식의 발전된 관현악법을 선보입니다.

음악은 이전보다 훨씬 강렬하고 웅장한 표현이 가능해졌고 이런 스타일은 이후 표준적인 관현악법으로 정립됩니다.

니벨룽겐의 반지 2부 〈발퀴레〉 중 '발퀴레의 기행'. 바그너의 음악 중 결혼 행진곡을 제외하면 가장 유명한 곡으로 현악기의 반주를 받은 금관악기들의 강렬한 음향이 돋보이는 곡입니다. 하지만 실제 오페라에서는 이렇게 멋지게 끝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설명하겠습니다 .

 

2.악극

바그너는 오페라라는 장르를 단지 음악이 중심이 된 연극이 아닌 연극 대본 미술 무용 등이 골고루 결합된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바그너에 의해 탄생한 종합예술 오페라는 악극(Musikdrama)’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악극의 특징으로는 아리아로 인한 오페라의 중단이 없이 끊임없이 진행된다는 것인데 이를 무한선율(unendliche Melodie)’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선율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기존 오페라들처럼 가수들이 아리아 멋지게 부르고 박수갈채를 받지만 그동안 공연이 단절되는 것을 막았으며 이 덕분에 공연 전체의 완성도는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로엔그린 이후의 작품들부터는 막과 막 사이의 인터미션을 제외하면 음악이 중간에 끊기는 일이 없이 쭉 지속되어 1~2시간동안 쉴 틈 없이 감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그너 악극의 다른 중요한 특징으로는 라이트모티프의 적극적인 사용이 있습니다.

니벨룽겐의 반지 2부 〈발퀴레〉 3막 전주곡 〈발퀴레의 기행〉. 실제 오페라에서는 이 유명한 음악도 독립된 곡이 아니라 단지 발퀴레 3막의 맨 앞부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이 곡의 메인 멜로디도 발퀴레의 라이트모티프입니다.

 

2-1.라이트모티프(유도동기)

라이트모티프는 바그너의 악극에서 정립된 개념으로 음악에서 특정 인물이나 상황 등과 연계하여 제시되는 주제나 동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나 뮤지컬 등에서 특정 인물의 테마곡이 그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에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 발상 자체는 바그너 이전에도 존재는 하였지만 바그너에 의해 완전히 확립되어 뮤지컬과 현대 영화음악에서는 기본적으로 사용될 만큼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뮤지컬과 영화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어벤져스 시리즈 등에서 이 라이트모티프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합니다.

 

 

3.트리스탄 화음

바그너가 그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사용하여 큰 논쟁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화음은 바, , 올림 라, 올림 사(F, B, D#, G#)로 구성되어 있는 불협화음입니다.

이 트리스탄 화음은 현대음악의 시작이라고 불릴 만큼 충격적이었으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화성학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 트리스탄 화음은 불협화음이기 때문에 곧이어 협화음으로 해결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바그너는 이 불협화음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불협화음이 주는 불편함과 긴장감을 음악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이는 수백 년 간의 이론으로 정립되었던 조성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트리스탄 화음에 영향을 받은 후배 작곡가들에 의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조성은 모호해지다 마침내 20세기 초 쇤베르크에 의해 모든 조성이 파괴되는 무조음악이 탄생하게 됩니다. ‘현대음악의 시작이라는 별명은 절대로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42초부터 시작). 4번째 음이 트리스탄 화음입니다. 뭔가 굉장히 신비로우면서도 불안한 느낌의 이 화음이 트리스탄 화음입니다.

 

 

마무리

 

그의 일생과 업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능력과 인성이 가장 반비례하는 작곡가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리하르트 바그너일 것입니다.

하지만 극도로 이기적, 자기중심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신도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몰락하기는커녕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습니다.

사후 브루크너, 말러,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등의 후배 작곡가들이 그의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음악의 발전을 이끌었고 브람스,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등은 바그너의 음악을 반대하며 평생을 바그너의 영향력에 삼켜지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는 작곡가로 유명해진 이후 지금까지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된 인물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