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소개

천재의 아이콘 - 모차르트의 생애와 미스테리들

교클 2021. 8. 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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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 ~1791)

 

모차르트 하면 음악계를 넘어 신동, 천재 하면 떠오르는 아이콘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겨우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 짧은 생애에도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에 하나로 평가받는 요절한 천재로 유명하죠.

하지만 그가 겨우 35살 인생동안 이룬 위대한 음악적 업적은 단지 천재였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정말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에게서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았고 이후 전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각국의 훌륭한 음악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일평생 꾸준한 발전을 했던 작곡가입니다.

지금부터 그의 짧았지만 눈부신 일생을 알아보겠습니다.

 

 

유년기

모차르트는 1756127일에 잘츠부르크에서 음악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미 모두가 아는 유명한 사실이지만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는 3살 때 누나가 피아노 치는 걸 눈으로 보고 피아노를 처음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5살 때 첫 곡을 작곡했으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금세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살 많은 그의 누나도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차르트는 그런 누나마저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외에도 8살 때 교향곡 작곡, 11살 때 오라토리오, 12살 때 오페라를 작곡하는 경악할 만한 능력을 보여줍니다.(이 글을 보는 우리는 그 나이에 뭘 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모차르트가 최초로 작곡한 곡 K.1 미뉴에트 1번)

 

자신의 아이가 이런 보고도 믿기지 않는 능력을 보여주자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자신의 직업도 뒤로한 채 작정하고 자식을 훌륭한 음악가로 키우리라 결심하고 6살이 된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온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어린 모차르트에게 여행은 고된 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비행기나 기차는커녕 도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흙길을 마차타고 힘들게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이렇게 고된 여행을 한 보람은 확실히 있었는데 이 여행으로 신동 모차르트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들의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고 무엇보다 각 나라들에 있던 유명한 음악가들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파리에 갔을 때 요한 쇼베르트(초기 고전파 시대의 중요 작곡가입니다.)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런던에서는 교향곡 작곡을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우리가 아는 그 바흐의 막내아들로 그 역시 초기 고전파 시대의 중요 작곡가중 하나)에게 배웠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언제든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던 만큼 이런 경험은 모차르트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769년부터는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연주여행을 가게 되는데 이 여행에서 모차르트는 지금까지도 알려져 있는 유명한 일화 하나를 만들어 냅니다.

1770년 로마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미제레레라는 성가를 듣게 됩니다.

알레그리가 작곡한 이 곡은 매우 아름다운 곡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교회는 이 곡의 반출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필사를 하려고 해도 10분이 넘는데다 다성부로 이루어진 복잡한 곡이었기 때문에 음악가들조차 감히 필사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곡을 모차르트는 한번 듣고 그대로 악보로 적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악보반출은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던 교회였지만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능력에 감탄한 교회는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은 이 미제레레 필사 에피소드가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이 여행으로 얻은 최고의 성과는 오페라 작곡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나중에 모차르트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가 되는 밑바탕이 됩니다.

그레고리오 알레그리-미제레레(Miserere mei, Deus). 모차르트는 이 길고 복잡한 곡을 한번에 배껴냅니다.

 

 

잘츠부르크 - 파리 시절

성장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본격적으로 전업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 시절은 모차르트에게 별로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의 고용주였던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심각한 트러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잘츠부르크 대주교였던 콜로레도 대주교는 음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었고 돈 낭비 정도로만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미 잘츠부르크에서 머무르기엔 급이 너무 높은 음악가였던 모차르트에게 급에 걸맞은 대우를 전혀 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봉급조차 짜디짠 수준이었습니다.

모차르트에게도 잘못은 있었는데 본업인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의 직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자주 외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나며 자리를 비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트러블을 버티지 못한 모차르트는 궁정음악가 지위는 뒤로한 채 파리로 향합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생활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어린 시절 신동 모차르트를 보며 열광했던 파리 시민들은 성인이 된 음악가 모차르트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자리를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엔 실패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를 따라갔던 어머니마저 파리에서 잃고 맙니다.

파리에서 실패한 모차르트는 별 수 없이 다시 잘츠부르크 생활을 이어가지만 대주교와의 트러블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궁정음악가 지위를 완전히 버리고 빈으로 향합니다.

 

(피아노 소나타 8번 a단조 K.310. 그레고리 소콜로브 연주. 파리 시절에 작곡한 곡으로 모차르트의 몇 안 되는 단조 소나타입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어머니를 잃었던 슬픔이 곡에 묻어나옵니다.)

 

 

빈 시절

어린 시절 연주여행으로 다녀간 적이 있던 도시인 빈에서 모차르트는 꽤 괜찮은 반응을 얻어냅니다.

여러 귀족들의 피아노 레슨을 하게 되었고, 피아노 연주자로 활약하며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등의 오페라 히트작을 발표하며 전업 작곡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잘츠부르크에서 궁정 음악가로 살면서 고용주에게 심하게 데였던 모차르트는 빈 시절에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프리랜서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중소도시인 잘츠부르크와는 달리 음악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대도시였던 빈을 무대로 중산층의 성장과 시민사회의 도래라는 시대적인 변화가 이런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게 만들었죠.

이곳에서 그는 아내 콘스탄체를 만나 결혼도 하게 됩니다. 콘스탄체는 악처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부부의 금슬은 좋았습니다. 다만 노는 걸 좋아하는 성격에다 모차르트와 쌍으로 경제관념이 없었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여러 히트곡으로 많은 돈을 벌었어도 지출이 더 많아 생활이 쪼들리는 일이 종종 있긴 했습니다.

빈 시절 모차르트는 여러 음악가들과 음악적인 교류도 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선배 대작곡가인 하이든과의 교류였습니다. 이후 둘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게 됩니다.

하이든은 현악4중주 형식을 확립한 작곡가였고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영향을 받아 작곡한 6곡의 현악사중주를 그에게 헌정합니다. 6곡의 현악사중주는 하이든 현악4중주로 불리며 모차르트의 대표 현악4중주로 현재도 많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현악4중주 19번 K.465 〈불협화음〉. 6개의 하이든 현악4중주 중 마지막 곡으로 1악장에 나오는 불협화음 때문에 붙은 제목입니다. 고전파 음악에서 불협화음은 작곡할 때 사용하면 안 되는 화음이기 때문에 불협화음을 과감하게 집어넣은 모차르트의 유머감각과 천재성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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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

모차르트는 1791930마술피리라는 오페라를 발표하게 됩니다.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인 이 곡은 역시 엄청난 히트를 쳤고 아직까지도 모차르트의 대표 오페라 중 하나로 남아 있는 곡입니다.

우리에게는 특히 밤의 여왕 아리아로 유명한 작품인데 사실 이 작품의 스토리에는 모차르트가 가입한 비밀단체 프리메이슨의 사상이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체의 상징이 곳곳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프리메이슨을 위한 곡을 여럿 작곡했던 모차르트는 이 오페라로 프리메이슨을 홍보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프리메이슨은 자신들의 상징을 외부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런 식의 때문에 모차르트가 이런 식의 기밀누설을 하자 프리메이슨 회원들은 기겁을 합니다.

때문에 모차르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경에 프리메이슨이 엮여있다는 음모론도 있었지만 사실 별 신빙성은...(이미 프리메이슨은 비밀단체라기엔 알려질 만큼 알려진 단체였고 지속적으로 조직의 세력이 줄어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마술피리 중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에 끓어오르고〉.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 노래. 본 제목보다 〈밤의 여왕 아리아〉로 더 널리 알려진 곡입니다.)

 

 

죽음

17917월 모차르트는 수상한 작곡의뢰를 받게 됩니다.

레퀴엠(진혼 미사곡)을 작곡해 달라는 의뢰였는데 의뢰자는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수상한 의뢰였으나 거액의 의뢰였기 때문에 당시 경제적으로 쪼들리던 상황이었던 모차르트는 승낙하고 작곡을 시작합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살리에리가 의뢰를 한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발제크 백작이라는 사람이 의뢰했습니다. 의뢰자를 밝히지 않은 것은 곡이 완성되면 본인의 작품으로 발표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곡을 작곡하면서 모차르트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재정상황이 안 좋아진 모차르트는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마술피리, 그리고 이 레퀴엠 3곡을 동시에 작곡해야 했는데 오페라 두 곡과 미사곡 하나를 동시에 작곡하는 강행군으로 체력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병에 걸린 모차르트는 급속도록 쇠약해지게 됩니다.(성홍열로 추측하긴 하지만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습니다.)

11월 중순 즈음부터는 건강이 매우 안 좋아진 모차르트는 결국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하고 125, 35살의 짧은 인생의 막이 내립니다.

빈 음악계에서의 그의 명성에 비해 장례는 매우 조촐하게 치러졌습니다. 왜냐하면 모차르트의 죽음 원인을 전염병 때문으로 진단했기 때문입니다. 방역수칙을 준수하느라 유명세에 걸맞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모차르트의 친지들과 동료 작곡가인 살리에리 등 매우 제한된 인원들만 참석한 채 다른 전염병 의심 사망자들과 함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때문에 지금도 모차르트가 묻혀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습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 lacrimosa. 모차르트는 이 곡의 8마디까지 작곡하고 죽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죽었지만 레퀴엠 작곡의뢰는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곡을 완성하지 못하면 비싼 계약금을 돌려줘야 하는 상황에 처한 부인 콘스탄체는 레퀴엠의 미완성 부분의 작곡방향을 지시받았던 제자 쥐스마이어에게 레퀴엠의 나머지 작곡을 의뢰합니다.

비록 음악성에 대한 논란이 지금까지도 있긴 하지만 쥐스마이어는 성공적으로 레퀴엠을 완성시키고 발제크 백작에게 악보를 넘겨줍니다. 모차르트가 죽은 지 2년 뒤인 1793, 이 곡은 발제크 백작이 작곡한 곡으로 초연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이 곡이 발제크 백작이 작곡한 곡이 아니라 모차르트의 작곡한 마지막 곡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살리에리의 독살?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열등감을 느끼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살리에리가 레퀴엠 작곡을 의뢰하며 쇠약해진 모차르트를 갈구면서 과로사하게 만들죠)

이 소문의 진실은 제가 이전에 쓴 글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링크: https://schoolclassical.tistory.com/7)

여기서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이 루머는 사실이 아닙니다.

살리에리는 살아생전 빈에서 모차르트보다 더 많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오스트리아 황실 궁정악장으로 오랫동안 제직하며 기득권 음악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질투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모차르트가 살리에리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다며 뒷담을 하는 내용의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겉으로 둘은 서로를 인정하던 업계 동료 사이였습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모차르트의 장례식에 참석한 소수의 사람들 중 살리에리가 포함된 것만 봐도...

 

생전에 살리에리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한 모차르트는 죽은 후에 반대로 살리에리를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됩니다. 19세기 낭만파 시절부터 그는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하나로 칭송받게 되었고 수많은 작곡가들이 그를 정신적인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현재 그의 작품은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배우고 연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전 세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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