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소개

인간승리의 아이콘 - 베토벤의 일생

교클 2021. 8. 24.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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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비창 소나타, 운명 교향곡, 합창 교향곡, 엘리제를 위하여〉...베토벤은 음악에 관심없는 사람들도 알 만큼 유명한 곡들을 많이 작곡한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입니다.

그리고 베토벤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청각장애입니다. 베토벤은 귀가 안 들린다는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고난을 겪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수많은 명곡들을 작곡하였습니다.

베토벤은 음악가들 중에서도 매우 극적인 삶을 살았고 이런 그의 일생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드라마틱했던 인생을 살펴보겠습니다.

 

 

유년기

베토벤은 17701217일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요한 반 베토벤은 궁정 가수였지만 술주정뱅이에다 폭력적인 성향의 좋지 않은 아버지였습니다. 어린 베토벤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요한은 어린 베토벤에게 강압적이고 혹독하게 연습을 시켰습니다. 요한은 신동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모차르트를 벤치마킹하여 베토벤을 제2의 모차르트로 홍보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토벤은 177838살의 나이로 첫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천재 마케팅을 위해서 나이를 두 살이나 낮추어 6살로 소개하기까지 했지만 이미 모차르트를 경험한 청중들은 그정도 까지는 아니었던 베토벤의 재능에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재능을 이용해 한몫 땡겨보려 했던 아버지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다행히 연주회의 경험이 음악가로서의 성장에 보탬이 되었고 음악가들에게는 어느 정도 눈도장을 찍는 데에 성공하여 178111살 때 크리스티안 네페에게 본격적으로 작곡을 배우게 됩니다.

네페와의 만남은 베토벤 일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까지 강압적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음악을 배웠던 베토벤은 헌신적이면서 인자한 네페를 매우 따랐고 그에게서 본격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키워나갔습니다. 베토벤은 네페에게서 독립한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그를 진정한 스승으로 존경하였습니다.

거기에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이후 인생의 핵심이 된 계몽주의 사상을 처음으로 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생에 걸쳐 큰 도움이 된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베토벤의 후원자로 베토벤이 21번 소나타를 헌정하기도 한 발트슈타인 백작도 이 시기에 만났습니다.

 

1787년에는 처음으로 빈 여행을 다녀옵니다. 이 때 모차르트를 만나서 그에게 천재성을 인정받은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사실 어떠한 증거도 없기 때문에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다만 베토벤이 작곡에 있어 모차르트에게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베토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어린 시절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고된 연습을 해야 했던 베토벤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의 사망에 베토벤은 큰 슬픔에 빠집니다.

1792년 아버지마저 죽은 이후에 베토벤은 고향 본을 떠나 마침내 빈에서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베토벤-피아노소나타 제1번 f단조 Op.2-1

 

초기-성공적인 커리어

빈에 도착한 하이든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천재와 천재의 만남이었으니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생겼을 거라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두 천재의 만남은 시너지는커녕 이상하게 삐걱거렸습니다. 하이든과 베토벤의 곡 스타일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밝지만 약간은 보수적이었던 하이든과 어둡지만 정열적이고 혁신적이었던 베토벤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나중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하이든에게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뒷담도 합니다. 하이든 입장에서도 아직 애송이 주제에 꼬장꼬장한 베토벤을 좋게 보지는 않은 듯 싶습니다.(베토벤이 하이든에게 예전에 했던 숙제를 베껴서 다시 제출하다 들켜 격노했다는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고집 센 베토벤은 스승에게 굽히고 들어가지 않았고 이미 유럽 최고의 작곡가였던 하이든이 풋내기 제자에게 굳이 맞춰 줄 이유도 없었던 거죠.

그래도 베토벤의 초기 곡들을 보면 하이든의 스타일이 상당히 보이기도 하는 등 알게 모르게 하이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베토벤은 후에 피아노 소나타 1~3(Op.2-1~3)을 하이든에게 헌정하는 등 스승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합니다.

베토벤은 빈에서 음악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빠르게 인기를 얻습니다. 귀가 멀기 전 베토벤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금세 빈 음악계의 유명인사가 되었으며 리히노프스키 백작과 같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된 후원자와도 관계를 맺습니다.

이후 발표한 발레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 교향곡 제1, 초기 현악4중주 6곡들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베토벤은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베토벤의 커리어는 매우 성공적으로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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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 청각장애의 시련과 극복

1802년 귀의 이상을 느낀 베토벤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갑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베토벤은 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처음에는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습니다. 하지만 점점 상태가 나빠졌고 더 이상 숨기지 못하게 된 베토벤은 절망에 빠집니다.

요양을 갔지만 귓병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베토벤은 자살을 마음먹고 유서를 작성하지만 유서의 마지막에는 마음을 고쳐먹고 운명을 극복하리라 다짐합니다. (이 글이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입니다. 베토벤은 이 유서를 생전에 공개하지 않았고 사후에 알려집니다.)

오래 전 유행한 만화 츄리닝의 한 장면. 베토벤은 오랜 기간에 걸쳐 귀가 멀었기 때문에 친구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닙니다 .;;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다시 태어나 빈으로 돌아온 베토벤은 각성하여 본격적으로 명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이 시기를 걸작의 숲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베토벤을 대표하는 유명한 작품들인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열정, 교향곡 영웅, 운명, 전원, 피아노 협주곡 3, 4, 5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 오페라 피델리오등 웬만큼 유명한 작곡가들도 일평생 작곡하기 힘든 숫자의 명곡들을 겨우 수 년 만에 만들었습니다.  (참고글-베토벤이 귀가 안들린 이후에 작곡한 곡들: https://schoolclassical.tistory.com/66)

걸작의 숲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영웅 교향곡을 꼽을 수 있습니다. 베토벤의 수많은 걸작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곡이라 매우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신분질서를 혐오했던 계몽주의자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에 매료되었고 그런 그가 이상적인 지도자로 생각한 나폴레옹을 위해 작곡한 곡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의 원래 제목은 보나파르트였습니다.

그런데 신분제를 파괴할 것으로 생각했던 나폴레옹이 도리어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자 격노한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고 적혀있는 악보의 표지를 찢어버리고 영웅으로 고쳐서 출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로도 쭉 나폴레옹을 증오한 베토벤은 웰링턴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이기자 웰링턴의 승리라는 곡까지 만들게 됩니다.

영웅 교향곡 2악장. ‘장송 행진곡’ 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합니다.

 

 

침체기

181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베토벤은 슬럼프를 겪게 됩니다.

베토벤 음악의 인기도 이전 같지가 않았고 갈수록 심해진 귓병은 이제는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까지 악화되었으며 결정적으로 1815년부터 시작된 조카 칼에 대한 양육권 분쟁으로 한동안 작곡에 전념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처했습니다.

발단은 동생 카스파가 죽기 전 베토벤과 칼의 어머니 요한나를 공동 후견인으로 한다는 유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나가 잦은 불륜에다 범죄까지 저지른 까닭에 어머니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베토벤이 단독으로 친권을 행사하기 위한 소송을 하였는데 이것이 4년에 걸친 기나긴 법정다툼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소송은 베토벤의 창작활동에 큰 방해가 되었고 심지어 1819년에는 Op넘버가 붙은 작품이 단 한 작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랜 법정다툼 끝에 1820년 양육권을 가져온 베토벤도 좋은 아버지가 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베토벤은 칼이 자신처럼 뛰어난 음악가가 되기를 바랐고 많은 돈을 들여 좋은 교육을 받게 해 주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과 뒤이은 어머니와 삼촌의 오랜 법정분쟁으로 멘탈이 박살나버린 칼은 베토벤의 바람과 다르게 지속적으로 엇나갑니다.

칼은 너무 엄격하고 강압적이었던 베토벤에게 질려버렸고 베토벤은 음악에 재능도 관심도 없던 칼에게 자신의 의사를 무리하게 강요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강압적인 음악교육으로 힘들어 했던 베토벤이 아버지와 비슷한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다 끝내 칼의 자살시도로 이어집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난 칼은 이후 본인의 뜻대로 군인이 되어 평범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후기-클래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들

우리들에게 가장 익숙한 말년 베토벤의 초상화. 손에 들고 있는 악보가 〈장엄 미사〉입니다 .

점점 나빠지는 건강과 요한나와의 지루한 소송전 동안에도 베토벤은 틈틈이 작곡을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를 작곡하였고, 장엄 미사와 디아벨리 변주곡과 같은 후기를 대표하는 걸작들의 구상도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베토벤의 귀는 완전히 멀어버렸지만 반대로 그의 음악은 전에 없이 깊어지고 심오해졌습니다.

이 시기부터 죽기 전까지 만든 작품들을 보통 후기 작품으로 분류하는데 주요 작품들로 피아노 소나타 29~32, 장엄 미사, 합창 교향곡, 디아벨리 변주곡, 현악4중주 12~16번등이 있는데 이 작품들은 클래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824년 베토벤은 필생의 역작인 교향곡 9합창을 완성 합니다.

베토벤은 20대 시절(무려 1번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전입니다!)부터 쉴러의 환희의 송가를 가사로 한 곡을 쓰고 싶어 하였는데 이 교향곡은 그 수십 년에 걸친 구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초연은 182457일 빈에서 실시하였습니다. 베토벤은 반드시 이 곡을 본인의 지휘로 초연하고 싶었지만 귀가 들리지 않던 베토벤이 지휘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해결책으로 베토벤이 지휘대에 서서 지휘를 하였지만 실제 지휘는 옆에 있던 미하엘 움라우프가 하였습니다.

마침내 이루어진 합창 교향곡의 초연은 대성공하였습니다.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대작곡가에게 화답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듣지 못하는 베토벤은 곡이 끝났음에도 지휘대에 우두커니 서 있었고 알토 독창자 카롤리네 웅거가 베토벤을 관객석으로 몸을 돌려주자 그제야 청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베토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영화 '카핑 베토벤' 에 나오는 합창 교향곡 초연 장면

 

합창 교향곡 이후 베토벤의 생애 마지막 3년을 대표하는 작품들은 현악4중주 12~16번입니다.

이 작품들은 통칭 후기 현악4중주로 칭하는데 음악의 심오함에 있어서는 합창 교향곡을 능가한다는 평까지 받는 작품들입니다. 이 중에는 135악장 카바티나153악장처럼 깊은 감동을 주는 곡들도 있고, 대 푸가처럼 시대를 100년은 앞서간 듯한 난해한 곡들도 있습니다.

1826년 말부터 베토벤은 건강이 매우 나빠집니다. 유명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이 병상에 눕자 베토벤이 평생에 걸쳐 교류했던 후원자들, 친구, 제자 등의 지인들이 선물을 보내주거나 찾아왔습니다.

죽기 1주일 전 한 젊은 작곡가가 병문안을 옵니다. 평생 베토벤을 존경했지만 만나지 못하다 이제야 겨우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작곡가의 이름은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베토벤은 슈베르트의 악보를 보고 감탄하며 그에게 앞으로 훌륭한 작곡가가 될 것이라며 격려하였습니다.(하지만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죽은 이듬해 죽습니다.)

1827326일 천둥번개가 치던 날 베토벤은 세상을 떠납니다. 음악활동으로 모았던 재산은 베토벤이 조금은 어긋난 사랑을 주었던 조카 칼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입대 후 타지에서 생활하던 칼은 교통사정으로 인해 임종을 보지 못하고 장례식 3일 뒤에야 빈에 도착하였습니다.

베토벤의 장례식은 2만 명이나 되는 빈 시민들이 참여하여 성대하게 진행되었고 관의 운구는 슈베르트, 훔멜, 체르니를 비롯한 36명의 작곡가들이 선별되어 대작곡가의 마지막 배웅을 하였습니다.

 

 

모차르트가 천재의 아이콘이라고 하면 베토벤은 인간승리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우했던 유년시절을 보냈고 모차르트처럼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뽐냈던 것도 아닐뿐더러 작곡가로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니 청각장애가 발생한 등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이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위대한 작곡가가 된 베토벤의 생애는 인간승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단지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곡을 쓴 수준이 아니라 서양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베토벤은 음악가의 지위를 본격적으로 높인 인물이었습니다. 선배 작곡가 하이든까지 음악가는 귀족에게 '고용'되는 존재였지만 베토벤은 귀족에게 '후원'을 받았습니다. 베토벤은 평생동안 귀족에게 후원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종속되지 않았습니다. 설사 아무리 많은 돈을 후원해 줬어도 베토벤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바로 연을 끊어버렸습니다. 이런 베토벤의 마인드를 대표하는 발언이 후원자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결별하면서 한 "이 세상에 당신같은 귀족은 수없이 많지만 베토벤은 오직 나 한사람 뿐이오!" 입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베토벤과 후원자들의 일화들를 보면 오히려 베토벤이 배은망덕한 것 아닌가 싶은 일화도 있을 정도인데 이는 겨우 수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상황입니다.

 

음악적으로 보았을 때 베토벤은 고전파 시대와 낭만파 시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취급받습니다. 낭만파 이후의 작곡가들 중 베토벤을 존경하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낭만파 시대의 음악가들은 저마다 베토벤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후배 작곡가들에게 베토벤은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이정표와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현악4중주 14번 5악장 ‘카바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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