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잡설

영원히 고통받는 살리에리

교클 2021. 3. 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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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명대사입니다.

우리에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 밀려 2인자의 삶을 살며 열등감에 시달리는 비운의 음악가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 처음 사용한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리에리 증후군이라는 표현까지 존재할 지경입니다.

 

이 재능충 모차르트 vs 2인자 범재 살리에리의 이미지가 처음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건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당대에도 모차르트의 죽음에 관한 여러 풍문들 중 모차르트와 경쟁 관계에 있던 작곡가 중 하나인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시킨 게 아닌가 하는 음모론이 회자되었습니다.

베토벤도 이 풍문에 대해 필담을 나눈 적이 있는데 대략 ‘스승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이런 내용이었다고...

살리에리가 죽고 몇 년 후 러시아의 작가 푸시킨이 이 스토리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인기를 얻었고 19세기 말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대본을 가지고 오페라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21세기 사람들에게까지 살리에리의 이름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데는 영화 아마데우스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 천재 VS 노력하지만 뛰어넘을 수 없는 범재라는 이 스토리는 굉장히 매력적이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언급되는 관계입니다. 나는 XX와 비교하면 살리에리 같은 존재라는 식으로 비유되는 경우도 많고요.

 

만약 살리에리가 알면 고소고발 들어갈 정도로 실제와는 좀 많이 차이가 있다는게 문제일 뿐...

 

(영화 아마데우스의 명장면. 두 사람의 신들린 연기와 모차르트가 목소리로 멜로디를 불러줄 때 같은 부분 실제연주를 배경으로 깔아놓은 편집에 감탄이 나옵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1750~1825)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살리에리가 남을 시기하고 질투할 위치가 아니였다는 겁니다.

살리에리가 어떤 사람이었냐면 1750년생 살리에리는 1774년 황실 음악가로 들어간 이후 1788년부터 궁정악장이 되었고 죽기 1년 전까지 30년이 넘도록 오스트리아 궁정악장 직을 맡았습니다. 황실 직속 음악가 중 가장 높은 자리를 수십년간 맡았던 사람으로 사실상 당대에 기득권 음악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제법 인기를 얻기는 했다만 자신만큼의 명성은 가지지 못한 채 일찍 죽은 모차르트에게 정신병적인 열등감을 느낀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죠.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는 차원이 다른 장수를 했기 때문에 중년 이후 음악 트랜드가 변하자 이후에는 주로 교육자로 활약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그 제자로는 베토벤, 슈베르트, 체르니, 리스트 등이 있습니다.ㄷㄷㄷ 아마 음악역사상 최고의 제자 라인업일 겁니다.

살리에리는 작곡가로도 성공하고 교육자로도 성공을 하며 부와 명예를 모두 누렸던 음악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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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이미 빈 음악계 기득권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던 시절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탈출한 후 신예 음악가로 오스트리아 빈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고퀄리티의 음악들을 많이 뽑아냈지만 안타깝게도 살리에리의 위상을 넘지는 못합니다.

당시 빈에서의 오페라(당시에는 거의 영화와 같은 수준의 위치를 가졌습니다. 클래식 중 가장 인기와 돈이 되던 장르) 흥행을 비교해 보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압도합니다.

오히려 모차르트가 빈에서 자기 오페라가 살리에리의 오페라에 비해 흥행에서 밀린다고 불평하는 뒷담을 하는 편지까지 쓴 적이 있습니다. 모차르트에게 능욕당하는 아마데우스의 장면만 기억하는 우리들의 이미지와는 정 반대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56 ~1791)

 

성격으로 둘을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집니다.

살리에리는 본인의 높은 지위에 걸맞는 온화하고 대인배스러운 성격이었습니다. 재능은 있는데 돈이 없는 젊은 음악가들을 무료로 가르쳐 주기까지 한 인성갑이었고 사교술도 뛰어나 두루두루 존경을 받으며 적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위에 잠깐 언급했던 베토벤이 살리에리에 대한 악성루머를 듣고 보인 반응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이에 비해 모차르트는...워낙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아버지 손에 붙들려 이곳저곳 연주여행 다니느라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익힐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다 사람들은 신동이라고 다 둥가둥가 해주는...이런 성장환경이 유럽 각국의 음악을 흡수하여 천재 음악가로 성장하는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성격 면에서는 결국 제멋대로에 사람들과 트러블을 자주 일으키는 성격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발언을 한 기록도 있지만 현실은 살리에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비교하자면 음악가 A(살리에리)와 B(모차르트)가 있는데 A는 대중 취향에 맞는 곡들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당대 최고의 인기 뮤지션이 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음악 외적으로도 각종 기부나 미담들로 인성갑, 대인배 소리를 듣다 나이가 먹은 뒤에는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B 못지않은 뛰어난 제자들도 여럿 배출해낸 뮤지션.

B는 A보다 조금 늦게 데뷔해서 혁신적이고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곡들을 발표해서 역시 많은 인기를 끌며 평론가들에게는 음악성으로는 A보다 더 낫다는 이야기도 듣지만 음악 외적으로는 온갖 인성 논란을 만들고 다니다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 비운의 뮤지션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추가: 살리에리 못지않게 모차르트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오해들이 있습니다.

1.모차르트는 당대에 인정받지 못했다. - 위에 썼듯이 모차르트의 작품은 살리에리 작품들 만큼은 아닐지라도 빈에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모차르트는 교회와 궁정에서 월급 받아먹으며 생활한 기존의 음악가들과 달리 프리랜서 음악가로는 최초의 인물인데 대중들의 인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프리랜서 작곡가가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하기는 힘들죠. (참고로 모차르트가 이런 혁신적인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데는 18세기 후반 절대왕정 시대가 저물고 시민사회의 성장이라는 시대적, 사회적인 배경도 작용했습니다.)

 

2.모차르트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 모차르트가 돈이 없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그건 모차르트와 아내 콘스탄체가 경제관념이 없어서 돈관리를 못해 일시적으로 돈이 고갈되었던 것뿐입니다.

 

3.모차르트는 재능빨로 창작의 고통 같은거 없이 즐겁게 작곡했다. - 위에 잠깐 언급했듯이 모차르트는 어린 나이에 유럽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연주여행을 했었습니다. 흙길을 마차타고 다니던 그 시대의 여행이 편했을 리가 없고 각 나라의 음악을 흡수하는 것도 당연히 공부하고 익혀야 하는거지 그냥 얻어지는게 아닙니다. 모차르트는 성인이 된 이후로도 끊임없이 연구를 하였고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모차르트 역시 일필휘지로 한번에 작곡을 한 게 아니라 끊임없이 퇴고를 하며 곡을 썼습니다.

 

 



 

2015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공동 작곡한 악보가 발굴이 됩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정말로 싫어했다면 이런 악보가 있을 리가 없겠죠. 더군다나 살리에리는 모차르트 사후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사버 모차르트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한때 둘 사이에 트러블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둘 사이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험악한 사이는 아니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공연을 같이 관람한 살리에리가 브라보를 계속 외쳤다며 흡족해하는 모차르트의 편지도 남아있습니다.)

 

 

(살리에리의 레퀴엠)

 

(모차르트의 레퀴엠-필립 헤레베헤 지휘)

 

두 사람 모두 레퀴엠을 작곡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꺼져가는 목숨을 억지로 붙잡아가면서 마지막 유언처럼 예술혼을 불태워 작곡한 모차르트의 레퀴엠보다는 확실히 곡의 치밀함이 덜하다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모차르트의 곡에 익숙하신 분들은 비교해 들으면 재미있는 감상이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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