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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분석/고전파 음악

음악에서 문학, 다시 음악으로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by 교클 2025. 6. 16.

Ludwig van Beethoven - Violin Sonata No.9 in A Major Op. 47 'Kreutzer'

<크로이처 소나타> 초판 악보 커버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일명 ‘크로이처’ 소나타는 바이올린 소나타 중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완성도 높은 작품입니다.

곡의 제목인 ‘크로이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단어는 아니며 단지 이 곡을 헌정받은 프랑스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로돌프 크로이처(Rodolphe Kreutzer)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곡의 제목이 크로이처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의 경우 영국 출신의 혼혈 바이올리니스트(아버지가 아프리카계 카리브인) 조지 브리지타워에게 헌정할 계획이었습니다.
브리지타워는 당시 영국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잘나가는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이 곡의 초연 역시 브리지타워가 진행하였는데 공연 시작 직전에야 악보가 완성된 탓에 그는 이 어려운 곡을 리허설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연주를 하였음에도 성공적으로 공연을 끝냈습니다. 베토벤은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데 큰 공을 세운 브리지타워에게 크게 감격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800년의 조지 브리지타워(1778-1860)


하지만 그 이후 둘의 관계는 금이가기 시작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공연 후 펼쳐진 뒷풀이에서 브리지타워가 당시 베토벤이 좋아하던 여인을 험담하는 말을 했고 베토벤은 이에 격분하여 브리지타워에게 이루어진 헌정을 취소하였다고 하는데 확인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찌되었던 베토벤은 브리지타워와의 불화로 인해 당초 이루어졌던 헌정을 취소한 후 딱 한 번 만나봤던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로돌프 크로이처에게로 헌정을 변경하여 정식 출판하였고 그 이후 이 작품은 ‘크로이처 소나타’가 되었습니다. 

정작 로돌프 크로이처는 자신에게 뜬금없이 헌정된 이 곡을 두고 ‘난폭하고 무식한 곡’이라고 평하며 평생 연주는커녕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곡의 제목이 ‘크로이처 소나타’가 된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죠.



곡의 분석

작곡 연도: 1802년 ~1803년

출판: 1805년

헌정: 로돌프 크로이처(Rodolphe Kreutzer)

초연 연도: 1803년 5월 24일

초연 장소: 빈 아우가르덴 극장(Augarten, Wien)

초연자: 브리지타워 (바이올린), 베토벤 (피아노)

베토벤-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스베틀린 루세브 바이올린, 손열음 피아노.

 

 

바이올린 소나타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고전파 시기까지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정작 피아노가 더 활발하게 등장하고 바이올린은 피아노에 종속되어 있는 듯한 비중을 차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하나 랜덤으로 찍어서 들어보면 바로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나타라는 음악 장르의 유래가 바로크 시대의 트리오소나타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인데 바로크 시대의 소나타는 기본적으로 여러 악기들이 서로 비슷한 비중을 두고 연주하는 음악이었고 이 트리오 소나타에서 파생되어 악기 수가 줄어든 독주악기 소나타가 나왔고 고전파 시대로 들어가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소나타가 된 것이죠.

하지만 베토벤의 이 작품을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서로 대등한 비중을 가진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1악장의 경우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12분에 걸친 진검승부를 벌이는데 그 긴장감과 폭발하는 에너지는 이 곡을 바이올린 소나타의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데 기여했고 아래에서 설명할 많은 예술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곡의 전체 길이는 무려 40분이 넘어가 당대의 일반적인 바이올린 소나타들의 길이를 한참 뛰어넘었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나 테크닉적인 난이도도 매우 높은데다 두 악기의 합도 중요한 매우 어려운 곡입니다.


1악장. Adagio sostenuto - Presto - Adagio, A장조-A단조, 3/4박자-2/2박자, 서주가 있는 소나타 형식.

베토벤-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1악장. 이작 펄만 바이올린,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피아노. 연주자 이하 동일

 

18마디로 이루어진 서주로 시작합니다. 서주는 A장조지만 분위기가 갈수록 어두워지다 템포가 Presto로 변경되며 A단조의 격정적인 제시부가 시작됩니다. 연주자에 따라 12~15분정도 되는 악장으로 이 곡에서 가장 중심이 되고 인기가 많은 악장입니다. 후술할 톨스토이의 유명한 소설 역시 이 1악장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죠.


2악장. Andante con variazioni, F장조 2/4박자, 주제와 5개의 변주 그리고 코다로 구성.

베토벤-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2악장

 

폭풍과도 같았던 1악장이 지나간 후 등장한 2악장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진행합니다. 처음에는 평온한 분위기로 진행되다 변주가 진행될수록 다채롭게 변주되지만 전반적으로는 경쾌하고 온화한 분위기의 악장입니다.


3악장. Presto, A flat장조 6/8박자, 타란텔라 스타일의 소나타 형식.

베토벤-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3악장

 

1악장처럼 Presto 템포에 춤곡 ‘타란텔라’ 리듬으로 바쁘게 진행되는 곡입니다.
그러나 1악장처럼 격정적이고 강렬한 분위기는 아니며 흥겨운 악장입니다. 
원래 이 악장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6번의 3악장으로 작곡한 곡이었으나 곡의 분위기상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다른 곡으로 교체한 이후 보관하고 있다 9번 3악장으로 재활용한 곡입니다.



이 곡의 영향을 받은 예술작품들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예술작품들은 문학, 소설, 음악, 영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정말로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법 유명한 작품들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1. 레프 톨스토이 <크로이처 소나타>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가장 유명한 예술작품으로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이며 베토벤의 음악에 영감을 받아 만든 이 소설이 다시 다른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소설의 내용은 주인공 포즈드니셰프가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트루하체프스키가 함께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껴 관계를 의심하다 결국 아내를 살해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에서 포즈드니셰프는 “그들은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했습니다. 첫 악장의 프레스토를 아세요? 아시냐고요? 으! 이 소나타는 정말 너무 무시무시합니다. 특히 이 부분은 더욱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톨스토이가 이 작품을 듣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2.  프랑수아 자비에 프리네의 그림 ‘크로이처 소나타’
프랑스의 화가 프랑수아 자비에 프리네(René François Xavier Prinet)가 톨스토이의 소설의 읽고 1901년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프랑수아 자비에 프리네 '크로이처 소나타'

주인공의 아내와 트루하체프스키가 곡 연습 중에 눈이 맞아 키스를 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물론 이는 포즈드니셰프의 상상일 뿐이죠.) 이 작품은 보통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의 책 표지 등에 자주 사용되곤 하는 그림인데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3.  레오시 야나체크-현악 4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

야나체크-현악4중주 1번'크로이처 소나타' 전곡

 앞서 말했던 톨스토이의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의 영감을 받아 작곡한 작품이 바로 이 야나체크의 현악4중주 1번 ‘크로이처 소나타에 영감을 받아’ 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은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직접적으로 인용하거나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야나체크는 톨스토이가 소설로 주창하던 결혼관(금욕 및 아내의 정숙함을 강조)에 반감을 가져 이를 비판하기 위해, 즉 자유로운 연애와 사랑을 대변하고자 작품을 작곡했다고 전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야나체크는 카밀라라는 젊은 여인과의 (불륜)로맨스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죠..ㅎㅎ



기타
1. 현재 바이올리니스트 로돌프 크로이처는 일반인들에게 이 곡의 제목의 유래가 된 사람 정도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나마 그가 만든 42개의 에튀드는 바이올리니스트라면 한 번씩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인지도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바이올리니스트 사이에서의 이야기이며 이 크로이처 에튀드도 최소 전공을 목표로 하는 수준은 되어야 접하는 교본이라 크로이처 자체의 인지도보다도 막상 당사자가 혹평했던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인지도가 높은 상황입니다. 

 

2. 베토벤은 이 곡을 두고 "Sonata per il Pianoforte ed uno violino obligato in uno stile molto concertante come d'un concerto" 라는 평을 했는데 해석을 하면 '거의 협주곡처럼, 매우 협주곡풍으로 쓰여진 피아노와 바이올린 오블리가토를 위한 소나타' 정도의 뜻입니다. 베토벤의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바이올리니스트 르노 카퓌송이 피아노 파트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크로이처 소나타를 연주한 영상이 남아 있습니다. 베토벤의 평가가 정확했는지 편곡 버전도 매우 잘 어울립니다.

르노 카퓌송이 연주하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크로이처> 소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