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잡설

음악가를 겸했던 유명인-프리드리히 2세, 루소, 니체, 슈바이처

교클 2021. 9. 26. 13:22
반응형

음악은 전문적으로 익히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높은 음악적 수준을 지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는 본업에서 엄청난 업적을 달성한 동시에 음악적으로는 아마추어 이상의 뛰어난 능력을 가진 능력자들도 존재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중에서 4명을 알아보겠습니다.

 

 

1.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1712년 1월 24일 - 1786년 8월 17일)

주업: 프로이센 국왕

부업: 작곡가, 플루티스트

 

첫 번째로 소개할 인물은 프로이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그는 훌륭한 내정으로 나라를 안정시킨 후 여러 번의 전쟁을 통해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만든 명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주로서 전쟁을 꺼리지 않았던 호전적인 프리드리히 대왕은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좋아하는 상반된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년기 왕자시절 어머니가 초청한 프랑스인 교사의 영향을 받아 음악을 매우 좋아했었는데 아버지 빌헬름 1세는 장차 왕이 될 아이가 예술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습니다. (실제로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음악보다 군사교육을 훨씬 철저히 받았음에도...빌헬름 1세는 사실 군주로서는 뛰어났지만 부모로서는 상당히 질 나쁜 아버지였습니다.)

아무튼 그는 한 국가의 지도자였음에도 음악에 진심인 편이었고 상당한 플루트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군주로써 매우 바쁜 삶을 사는 와중에도 300여 곡을 작곡하였고 본인이 쓴 곡을 궁정 연주회에서 직접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 - 플루트 협주곡 4번 라 장조)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로 1747년 그 유명한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상수시 궁전에 초청하여(그의 아들 C.P.E. 바흐가 프로이센의 궁정 연주자였습니다.) 대왕이 직접 제시한 멜로디를 가지고 즉흥연주를 선보였던 일이 있습니다. 이 때 바흐는 대왕의 주제를 가지고 즉흥으로 3성 푸가를 훌륭히 연주하였고 뒤이어 6성 푸가를 연주해보라는 주문에는 그 멜로디가 푸가에 적합하지 않아 양해를 구하고 본인의 멜로디로 즉흥 푸가를 연주합니다. 아무튼 이 때 바흐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극찬을 받았고 라히프치히로 돌아온 이후 대왕의 주제를 가지고 6성부 곡을 작곡하여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바칩니다. 이 곡이 바흐 말년의 역작인 음악의 헌정입니다.

(바흐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만남을 재현한 TV시리즈 영상입니다.)


 

 

2.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년 6월 28일 ~ 1778년 7월 2일)

주업: 철학자

부업: 작곡가, 음악평론가

Jean-Jacques Rousseau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 등의 사상을 통해 민주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끼진 중요한 사상가 입니다. 하지만 그는 철학자로 유명해지기 이전에는 음악가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혁신적인 새로운 악보 기보법을 발표하기도 하였고(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오선보를 사용합니다. 성공 여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여러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마을의 점쟁이라는 오페라입니다. 이 오페라는 루소 생전에 상당한 인기를 끈 히트작이었고 심지어 이 오페라에 8장에 나오는 판토마임은 지금까지도 연주가 되는 유명한 곡인데 바로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가 이 곡의 멜로디를 가지고 만든 곡입니다.

 

그는 이 외에도 음악사에 기록된 유명한 음악논쟁에도 참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752년 프랑스 음악계에서 벌어졌던 부퐁 논쟁입니다.

이 논쟁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오페라를 지지하던 음악가들과 선진 이탈리아식 오페라를 지지하던 음악가들 간의 음악논쟁이었습니다. 현대로 치면 예술영화 vs 오락영화 논쟁 비스무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합니다.

이 논쟁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페르골레지의 마님이 된 하녀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오페라가 파리에서 상연되자 루소가 이 오페라의 유쾌하면서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스토리를 극찬함과 동시에 이전까지의 스토리의 개연성이 없고 과장된 서정 비극의 프랑스 오페라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루소의 대척점에 있던 대상은 궁정 작곡가 장 필리프 라모로 당시의 대표적인 프랑스 오페라 작곡가였습니다.

이렇게 루소파 vs 라모파로 이루어진 이 논쟁은 일단은 국왕 루이 15세가 지지하던 라모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논쟁은 단순히 음악 취향 차이로 인한 논쟁으로만 볼 것은 아닙니다. 이 논쟁은 본질적으로 현실적인 스토리와 멜로디를 중심으로 한 혁신적인 오페라 vs 귀족들이 선호하는 화성 중심의 보수적인 정통 오페라의 대결이었고 이는 곧 이어질 시민사회의 등장을 예고하는 논쟁이기도 하였습니다.

이후로 작곡된 수많은 오페라 히트작들이 이런 이탈리아 스타일 작품인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미 구식 음악이 되어버린 프랑스 궁정 오페라는 음악계에서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루소의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 중 판토마임. 주의 깊게 들어보면 동요의 주제가 조금씩 들립니다.)


반응형

 

3.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주업: 철학자

부업: 작곡가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9세기의 유명 철학자 니체도 작곡을 하였습니다. 그는 10살 때 처음 작곡을 하였고 10대 시절에 많은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이후에는 본격적인 철학자 활동을 하며 저술에 바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많은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틈틈이 작곡을 하여 70여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리하르트 바그너와 깊은 친분을 가졌습니다. 1868년 바그너를 처음 만났던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세계에 완전히 빠져서 열혈 바그네리안(바그너 마니아)이 되었습니다.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예술의 원천으로 생각하였는데 주로 독일 신화를 소재로 삼아 오페라를 작곡하던 바그너를 이 그리스 비극의 정신을 현시대에 재현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매우 따랐던 것입니다.

서로 예술관이 일치하였던 둘은 31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바그너가 연상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니체와 바그너는 둘 다 쇼펜하우어를 매우 존경하였는데 니체가 철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한 것도 쇼펜하우어에 빠지면서였고 바그너 또한 그의 작품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후에 두 사람을 결별을 하게 되는데 1882년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에서 기독교로 귀의하려는 듯 한 모습을 보인 바그너에게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생전에 아버지처럼 따랐던 바그너에 대한 크나큰 배신감을 느껴 바그너에게 결별을 선언하였고 바그너가 죽은 후에도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등의 저서에서 꾸준히 바그너를 계속 공격하였습니다.

그렇게 바그너와 결별한 말년의 니체는 특이하게도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에게 심취합니다. 바그너의 무거운 음악과는 전혀 다른 지중해적인 밝은 음악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니체의 합창곡 〈생애의 찬가〉. 니체는 관현악과 합창이 같이 나오는 이런 복잡한 음악도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4.알베르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1875년 1월 14일~ 1965년 9월 4일)

주업: 의사

부업: 오르가니스트, 음악학자

Albert Schweitzer

슈바이처가 훌륭한 오르가니스트였다는 사실은 위인전 등에서도 간략하게 언급되기 때문에 많이들 알 것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였고 이후 1893년부터 프랑스의 유명 오르가니스트인 샤를 마리 비도르에게 오르간을 배웠습니다. 이후에는 비도르와 함께 파리에서 바흐 협회를 설립하고 바흐에 관한 저서도 출판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아프리카의 환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 이전에는 세계적인 오르가니스트이자 바흐 연구가였습니다.

 

그는 오르가니스트로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을 위한 의료봉사를 하기로 마음먹고는 자신의 명성을 모두 포기하고 30세의 나이에 7년 동안 의학을 새로 배운 후 38세에 가봉의 랑바네레로 향합니다.

본격적인 아프리카에서의 의료활동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음악활동의 비중은 낮아졌지만 그래도 열대지방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방습 처리한 피아노를 가지고 틈틈이 연습했으며 종종 유럽에 들러 연주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환자를 치료할 약품 비용과 같은 병원 운영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의 의료봉사는 순전히 개인의 의지로 실행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운영비 같은 것도 전혀 없이 스스로 돈을 벌어서 충당해야 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기부를 받기도 했었지만 주로 강연과 오르간 연주회에 음반 레코딩까지 하며 병원 운영비를 마련했습니다. 그의 주 레퍼토리는 당연히 바흐의 오르간 곡이었고 이렇게 남긴 슈바이처의 바흐 연주 음반은 현재도 찾아 들을 수 있습니다.

(슈바이처가 연주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단조. 오래된 연주라 음질이 나쁘지만 담백하면서도 흠잡을 곳 없는 연주입니다. 물론 슈바이처 박사가 이 레코딩을 한 목적을 생각하면 감히 연주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한다는 것조차 조심스럽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