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에서는 샘플링이라는 작곡 기법이 존재합니다.
이전에 만들어진 곡의 일부분을 가져와 새로운 곡을 만드는 데 써먹는 방식을 말하죠.
샘플링이라는 용어는 대중음악 쪽에서 유래한 단어지만 이러한 행위 자체는 당연히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한 유서 깊은 작곡 기법입니다.
클래식 작품들 중에서도 이전에 존재한 멜로디나 기타 요소들을 가져와서 자신의 곡에 써먹은 사례들이 ‘아주 많이’ 존재합니다.
그 대상이 된 곡들도 상당히 많은데 이번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히 많이 ‘샘플링’된 클래식 음악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이번 글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샘플링한 대중음악이 아닌 클래식-클래식 간 인용된 사례들만 언급합니다.
1. 그래고리안 성가 중 ‘진노의 날’(Dies Irae)
그레고리안 성가는 아주 오래전부터(대략 9~10세기 경으로 추측) 가톨릭에서 미사 때 부르던 성가로 모든 서양음악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곡입니다.
그 중 ‘진노의 날’은 그레고리안 성가 중에서 특히 많이 차용된 음악입니다.
‘진노의 날’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모차르트나 베르디가 작곡한 레퀴엠에 수록된 곡이 일반인들에게 유명하지만 클래식 작곡가들 사이에서는 서양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진노의 날’이 가장 큰 영감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노의 날의 첫 7개의 음 ‘도-시-도-라-시-솔-라’ 멜로디를 사용한 작품만 해도 수백여 곡이 알려져 있으며 일반인들도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한 대작곡가들도 이 멜로디를 이용하여 많은 명곡들을 작곡하였습니다.
이 곡의 멜로디를 차용한 유명한 작품들
1)베를리오즈 - '환상 교향곡' 5악장 중반부
2) 이자이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3) 리스트 - 죽음의 춤(Totentanz)
4) 라흐마니노프 -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중 제7, 10변주
5)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4번 2악장
6) 말러 - 교향곡 제2번 ‘부활’ 5악장
7) 홀스트 - ‘행성’모음곡 중 ‘토성’
8) 쇼스타코비치 - 교향곡 제14번 1악장
이 외에도 수 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아래 링크에 목록이 있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Dies_irae
2. 라 폴리아
클래식 음악을 찾아보면 (특히 바로크 시기의 작품들 중)〈라 폴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곡들을 여럿 찾을 수 있습니다.
라 폴리아는 스페인-포르투갈의 춤곡에서 유래하였는데 포르투갈어로 ‘광란’정도의 뜻으로 특정한 화성 진행를 기초로 한 멜로디로 만든 작품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이 또한 수백년 전부터 존재하던 유명한 멜로디로 정식으로 작곡한 ‘라 폴리아’를 포함하여 이 멜로디를 인용한 수 많은 작품들이 작곡되었습니다.
15~16세기 즈음부터 라 폴리아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며 현재 우리가 아는 멜로디와 화성진행을 갖춘 완벽한 형태의 곡을 최초로 작곡한 사람은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륄리입니다. 이후 코렐리, 비발디 등이 라 폴리아를 작곡하였고 스카를라티, 바흐, 헨델 등의 작곡가도 라 폴리아를 인용한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라 폴리아 자체는 바로크 시대에 주로 작곡되었지만 폴리아의 주 선율은 바로크 시대가 지나간 이후에도 수많은 작곡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리스트나 라흐마니노프 같은 낭만파 시기 작곡가들까지 이 멜로디를 이용하여 피아노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유명한 라 폴리아 및 이 멜로디를 차용한 유명 작품들
1)코렐리의 ‘라 폴리아’ – 라 폴리아라고 하면 그냥 이 작품을 떠올리는 분도 많을 만큼(ex. 라흐마니노프) 가장 유명한 라 폴리아라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2)그 외 륄리, 비발디, 마린 마레, 살리에리 등 수 많은 작곡가들이 작곡한 폴리아
3)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 4번 중 사라방드
4)프란츠 리스트-스페인 광시곡
5)라흐마니노프-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위에서 말했듯이 라 폴리아는 코렐리가 작곡한 곡이 아닌데 라흐마니노프는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3.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치오 중 24번
흔히 파가니니 카프리스라고 부르는 작품으로 매우 유명하면서도 난이도 높은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입니다.
파가니니는 당대의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초월하는 엄청난 테크닉으로 비르투오소의 시대를 개척한 인물이며 그가 작곡한 이 작품은 당시까지 존재한 바이올린의 테크닉들을 집대성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여 세상에 발표된 이 곡은 후대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 되었으며 특히 맨 처음에 등장하는 유명한 주제 멜로디는 바이올리니스트 뿐만 아니라 수 많은 다른 악기 작곡가들까지 매혹시켜 샘플링 되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두 곡은 작곡가를 알 수 없는 옛날 멜로디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샘플링이라는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곡의 멜로디를 차용한 유명한 작품들
1)리스트-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연습곡 중 6번
자기 입으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말할 만큼 파가니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곡가답게 단순히 멜로디를 차용한 수준을 넘어 이 곡을 피아노에 맞게 편곡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2)브람스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기교를 과시하는 것보다 형식미와 균형미를 더욱 중시하던 브람스조차도 파가니니 작품에 영향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Book1과 Book2 합쳐 총 28개의 변주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이며 파가니니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그런지 브람스의 작품 중에서 기교적인 면이 강조되는 작품입니다.
3)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라흐마니노프는 이번에도 등장합니다. 이 곡은 ‘진노의 날’에서도 등장했던 곡인데 실제로 이 곡은 진노의 날과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의 멜로디를 둘 다 사용한 작품입니다.
라프마니노프 말년에 작곡한 대작으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일종의 피아노 협주곡이라고 할 수 있으며 협주곡이라고 본다면 라흐마니노프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입니다.
그 외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을 인용한 작품들의 목록은 아래 링크(imslp)를 참조
https://imslp.org/wiki/List_of_Variations_on_Paganini%27s_Caprice,_Op.1_No.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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